감각의 제국

 

25년의 세월동안 세계를 표류하던 세기의 화제작,
드디어 한반도에 닻을 내리다!


세계 언론의 격찬을 받고서도 온전히 상영될 수
없었던 비운의 걸작


76년 제30회 깐느영화제의 한 시사회 장은 3천여 명이라는 기록적인 인원이 터질 듯이 밀려들어 북새통을 이루었다. 이들은 파격적인 성묘사로 자국인 일본에서 조차 상영되지 못하고 깐느에서 첫 선을 보이게 된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문제작 <감각의 제국>을 보기 위해 몰려든 것이었다. 사람들은 영화가 끝나고도 자리에서 떠날 줄 몰랐고 다음날 세계 각국의 기자와 평론가들은 <감각의 제국>에 대한 격찬을 브리핑하기에 분주했다. 남녀 주연배우들이 보여주는 실제 정사, 엽기적인 성행위와 충격적인 결말, 그리고 극도로 아름다운 영상 속에 뾰족하게 날이 선 비판정신까지 담아낸 <감각의 제국>은 사람들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포르노를 자유롭게 상영할 수 있는 프랑스를 제외한 미국, 영국, 이탈리아 등 세계 각국에서 검열의 쓰라린 횡포를 겪으며 개봉되어야 했던 비운의 걸작 <감각의 제국>. 25년의 표류 끝에 드디어 가깝고도 먼 나라 대한민국에서 오랫동안 묶어두었던 여장을 풀게 되었다.

 

문제의 감독과 제작자가 이루어낸 영화 역사의 통쾌한 승리

'제작방식을 바꾸지 않고는 영화도 바뀔 수 없다' - 색다른 제작방식으로 검열에 도전

동경대에서 법학과 철학을 전공한 엘리트 감독 오시마 나기사.
그는 전반적인 변혁의 분위기로 어수선하던 60년대 일본사회에서 투쟁의 기치를 높이 든 학생 운동가였다.
'영화는 정치투쟁의 수단이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쇼치쿠(松竹) 영화사에 입사한 이후 일본 영화계 최고의 이슈메이커가 되었다.
성기나 성교 장면을 담은 영화의 제작, 현상, 편집 자체가 강력하게 금지되었던 70년대의 일본에서 <감각의 제국>을 찍는 다는 것은 국가 지배 체제에 대한 정면 도전이나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의 제작자로부터 제작 지원과 연출 의뢰를 받은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기발한 제작방법을 선택한다.
다름아닌 '일본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하는 프랑스 영화'가 그것.
프랑스에서 필름을 수입한 후 일본에서 영화를 찍고 그대로 프랑스로 가져가 현상과 편집을 마무리하는 방식이었다.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법의 틈새를 이용해 합법적인 방법으로 영화를 찍은 기지를 발휘한 것이다. 이런 모험이 없었다면 거장도 걸작도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 편의 영화가 편견없이 인정되는 사회를 위해 꺽지 않은 고집

<감각의 제국>을 둘러싼 7년간의 법정투쟁

자신의 영화가 쉽게 상영될 수 없으리라 예측했던 오시마 감독의 생각은 영화 제작과 같이 발행되었던 시나리오집의 외설물 유포 혐의로 발행인과 함께 고소를 당하면서 현실이 된다.
너무나 파격적인 정사 장면도 문제였지만 영화 속의 몇몇 장면들이 일본을 폄하하고 조롱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재판은 더욱 불리하게 진행되었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일장기로 늙은 걸인의 성기를 건드리거나열심히 진군하는 군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둘만의 성에 탐닉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일본 제국주의의 규범에 충실하던 자들에게 상당히 눈에 거슬리는 표현이었던 것이다.
한편의 영화가 아무런 편견없이 상영되는 사회를 위한 지루한 법정 투쟁은 장장7년 동안 계속되었고 드디어 두 사람은 무죄 선고를 받기에 이른다.
하지만 <감각의 제국>은 충격적이고 엽기적인 장면들로 인해 상당부분 모자이크 처리가 되었고 포르노가 자유롭게 상영되는 프랑스에서만 오리지널 버전이 상영된 비운의 작품이 되었다.
"나에게 있어 포르노 영화란 성기나 성행위를 찍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포르노 영화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기에 성립되는 개념이며 <감각의 제국>은 볼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일본에서는 완벽한 포르노 영화가 되었다."라고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말한다.

 




"충격적 실화 소재" - '아베 사다'를 다룬 영화 중 가장 빛나는 시선

1936년, 일본의 군국 체제가 극에 달할 무렵 일본 열도를 발칵 뒤집은 치정 사건이 벌어졌다.
'아베 사다'라는 기생(게이샤)이 시의원인 애인 키치조우를 교살하고 그의 성기를 자른 사건이 바로 그것.
당시에 호외가 뿌려질 정도로 충격을 주었던 이 사건은 '아베 사다' 사건으로 불리우며 숱한 연극과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
'아베 사다'를 소재로 만들어진 많은 작품들이 남근을 잘랐다는 것에만 초점을 둔것과는 달리 오시마 감독은 일본 군국주의와 게이샤(기생) 문화에 대한 비판을 바탕에 깐 도전적인 영화로 <감각의 제국>을 탄생시켰다.
세상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둘만의 낙원으로 빠져들었던 이 두 사람의 사랑은 충격적인 결론으로 끝을 맺었지만 '아베 사다'의 간절한 사랑은 세상 사람들의 뜨거운 동정을 얻기에 충분했다.

 




'세계 최초' 주연배우들의 실제 정사 도전 그리고 성공!

'실제 정사' 또는 '실제 정사 의혹'을 불러일으켰던 영화는 많았다.
그 중 대표적인 작품이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와 '폴라X'.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진한 키스씬도 낯 뜨거웠던 시절에 과감하게 실제 정사를 선보인 도전적인 영화 <감각이 제국>이 있었다.
<감각의 제국>을 찍기 이전에 오시마 감독은 '왜 러브씬에서는 연기가 아닌 진실한 섹스를 하면 안 되는 것인가?'라고 늘 의문을 가졌다.
인간의 욕망을 철저하게 시각화하는 것이 영화라고 생각했던 오시마 감독은 철저한 성적 표현을 위해 섹스장면을 연기가 아닌 있는 그대로 찍기에 이른다.
감독의 이러한 의식 세계에 동참했던 두 배우는 당시 대표적인 청춘 배우였던 후지 타츠야와 패션모델 마츠다 에이코.
이 두 사람은 영화 역사에 길이 남을 용기 있는 배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키치조우 역 / 후지 타츠야(Fuji Tatsuya)

"당신이 좋으면 나도 좋아"

허무한 표정에 담긴 처연한 색광(色狂)의 눈빛

냉소적이면서도 허무함이 가득한 눈동자, 요란스럽지 않으면서도 능숙한 솜씨로 젊은 애인 사다의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버린 키치조우.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칼을 들고 위협하며 절대 떠나지 말라는 사다의 귀여우면서도 섬뜩한 협박에 그저 어린애 달래듯 웃어넘기는 남자 키치조우.


사다를 사랑할수록 자신의 죽음에 가까이 가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녀의 애욕까지 온전히 받아들이는 시대의 아웃사이더.

순순히 자신의 목을 내맡기며 운명을 예감하는 남자. 어쩌면 그는 시대에 조응하지 못한 우리의 자화상이며 삶의 희비를 모두 달관한 아름다운 낙오자일지도 모른다.

기자회견 전 날까지 정해지지 않았던 키치조우 배역.

다행히도 그 당시 일본영화계의 청춘배우로 이름을 날리던 후지 타츠야가 촬영 당일 현장에 나타났다. 1941년생으로 당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35세의 인기배우가 키치조우 배역을 맡으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배우로서는 치명적일 수 있는 전라 노출과 실제 정사 연기가 필요한 배역 키치조우. 평소 오시마 감독의 작품세계를 동경해왔던 후지 타츠야는 오랜 시간 숙고한 끝에 조용히 촬영장에 나타나 역사에 길이 남을 연기를 하게 되었다.

<감각의 제국>의 연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열정의 제국>(78년)에서도 과감한 노출연기를 선보여 오시마 감독이 깐느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는데 큰 공헌을 하기도 했다.

<열정의 제국> 이후 거의 20여 년을 영화에 출연하지 않다가 96년 이와이 순지가 각본을 쓴 <Acri>에 출연하였다.

 

아베 사다 역 / 마츠다 에이코(Matsuda Eiko)

"당신을 절대 놔주지 않을 거예요"

순결한 욕망이 뒤틀린 집착으로 바뀐 순간, 죽음을 손 안에 넣은 여자

'아베 사다'. 그녀는 아름다운 육체 속에 손가락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작은 우주를 담고 있다.

어느 날 몰래 엿보게 된 주인 부부의 새벽 정사. 그리고 주인 남자의 매력에 흠뻑 빠져버린 '사다'. 서로의 눈에 이끌린 '사다'와 '키치조우' 두 사람은 세상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둘 만의 작은 유토피아로 찾아든다.

오시마 감독은 '아베 사다'를 단순히 욕정을 못 이겨 사랑하는 이의 남근을 잘라버린 유치한 정신병력의 소유자로 그리지 않는다.

1930년대 일본 제국주의 하의 억압되고 왜곡된 성적 구조와 본능에 충실한 사랑이 버림 받을 수 밖에 없는 사회에 대한 저항을 '아베 사다'라는 여인의 행적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아베 사다'를 소재로 한 영화의 여주인공을 구한다는 말이 전해지자 인기 히로인부터 무명 모델까지 수많은 여배우들이 출연의사를 전해왔다. 그만큼 '아베 사다'는 오랫동안 일본인들의 가슴에 남아있는 동정 어린 여자였고 배우라면 꼭 한번은 해보고 싶은 배역이었기 때문이다.

오시마 감독이 선택한 현대의 '아베 사다'는 순수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집요한 인상을 풍기는 인기 패션 모델 마츠다 에이코였다.

세계 어느 나라의 여배우도 도전하지 못했던 실제 성행위 재현은 '아베 사다' 사건 만큼이나 센세이셔널한 것이었으며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고도 남는 것이었다.

고전적이면서도 세련된 이미지가 함께 녹아있는 마츠다 에이코. 그녀는 자신이 연기한 '아베 사다'의 운명적인 삶처럼 <감각의 제국> 이후 한편의 영화만을 남긴 채 영원히 연기 생활을 접어야 했다. 그러나 아직도 세계인의 화제 속에 서있는 그녀의 용기있는 모습은 아름답기만 하다.

 

그들의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운 사랑...

1936년 5월 18일 동경 아라가와 구의 요정 '마사키'에서 한 남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수사 결과, 피해자는 나카노구에 있는 요정 '요시다야'의 주인인 이시다 키치조우, 가해자는 '요시다야'의 전 종업원이었던 아베 사다로 밝혀진다.

키치조우의 사인(死人)은 교살. 성기가 잘려져 있고, 이불과 시체에는 '사다와 기치, 둘이서 영원히'라는 문구가 붉은 피로 쓰여 있었다.

3개월 동안 밀애를 나누던 두 사람은 키치조우 부인의 눈을 피해 4월 23일 같이 도망을 나와 요정 '마사키'에 틀어박힌 후 애욕의 생활에 빠져들었다.

사다는 키치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영원히 자신의 남자로 남기기 위해 그의 목을 조르게 된다.

5월 20일 시나가와역 주변의 여관에서 체포된 사다의 손에는 종이에 꼭 싸인 키치조우의 성기가 쥐여 있었다. 그녀는 경찰에게 매우 침착한 태도로 '제가 아베 사다입니다'라고 이름을 밝혔다.

이 충격적이고 엽기적인 사건은 당시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했지만 전쟁에 지쳐있던 사람들에게 호기심어린 사건으로 비춰졌고 동정어린 여론에 따라 아베 사다는 징역 6년형에 처해지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고소당한 오시마 나기사

1976년 6월 15일
출판사 삼일서적에서 영화의 사진을 포함한 <감각의 제국> 시나리오집이 발행

7월 28일
경시청 보안1과가 형법 175조에 해당하는 외설물 유포 용의로 적발(영화가 완성된 해에 경찰이 편집실과 오시마 나기사의 자택 수색 도중에 모든 자료들을 압류했다)

77년 8월 15일
동경지검이 삼일서적의 다케무라 사장과 오시마 나기사를 고소. <감각의 제국>을 둘러싼 기나긴 재판 시작.

78년 2월 27일
동경 지방재판소 검사 논고
"그는 우리를 우롱합니다. 그는 우리의 조직을 유린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그의 잘못에 대한 값을 치르도록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합니다. 그의 영혼의 부정함과 그의 실제 생활에 있어서의 패륜은 자연에 위배되는 영상들에 책임을 져야하고, 또 우리는 오늘날 그런 탈선한 도덕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야 합니다. 그가 과연 예술과 포르노의 차이를 아는지요? 우리를 가치없는 길로 이끌고 광기와 혼란 속에 잠기기를 원하는 오시마 나기사는 분명 생각의 잘못을 저지른 것이며, 그는 싸구려 포느로 작가입니다."

79년 10월 19일
동경 지방 재판소가 무죄 판결 내림. 그러나 동경 지검은 이에 불복, 공소심을 신청, 첫 수색과 압류 이후 6년에 걸친 재판 이어짐.

82년 3월 4일
제5회 공판. 오시마 나기사는 1시간 10분 동안 '외설 무엇이 나쁜가'라는 제목으로 변론. "외설은 법관의 머리 속에 있는 것이며 정부에 대항하는 목소리를 줄이기 위해 정부가 규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주장.

82년 6월 8일
동경 고등재판소가 두 피고인의 무죄 인정.